이스탄불

2012. 2. 17. 17:51여행

 

"지중해 연안의 티레(Tyre, 현재의 레바논)에 정착한 페니키아인들은 오래 전부터 그리스의 해안지방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 그즈음 페니키아인 선단이 아르고스(그리스 남부 페로폰네스 반도의 도시)에 정박하여 그리스인들을 상대로 물물교환을 하고 있었다. 5 ~ 6일 후 물건이 거의 팔려 그들이 떠날 즈음하여 아르고스의 공주인 이오(Io)가 시녀들을 데리고 배에 와서 남은 물건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때 페니키아인들은 공주와 시녀들을 납치하여 이집트로 도주하였다.

후대에 그리스인들은 페니키아인의 근거지인 티레를 급습하여 그곳의 공주인 유로파(Europa)를 납치하고, 또 다른 일단의 그리스인들은 소아시아의 교역을 가장하여 콜키스(Colchis, 오늘날 터키 서부 해안)의 항구에 정박한 후 그곳의 공주인 메디아(Medea)를 납치한다. 격분한 콜키스의 왕은 사신을 그리스로 보내서 공주을 돌려주고 배상을 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리스인들은 과거에 이오를 납치 당한 후에 배상을 받지 못했음을 내세워 이를 거절한다.

수세대 후 소아시아의 트로이 왕 프리암의 아들인 알레산드로스(패리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자신이 직접 그리스의 공주를 납치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우스의 신부였던 헬렌을 납치하여 자신의 신부로 삼았다. 메넬라우스는 사신을 보내서 헬렌을 돌려 보낼것을 요구했으나 패리스가 이를 거절하자 그리스는 대규모의 동맹군을 파견하여서 트로이를 멸망시킨다.”

위의 글은 그리스의 헤로도투스가 약 2,500년전에 쓴 Histories의 첫머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후에도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략, 알렉산더 대왕의 아시아 정복, 로마, 사라센 등등 중동과 유럽과의 갈등은 계속 됩니다. 이 글에서 우리는 현재의 중동 사태가 팔레스타인 문제라든가 종교적인 갈등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수천년의 역사적인 뿌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가 접촉을 한 3000년 동안 오늘날 같이 갈등이 있었던 시기가 있었는가 하면 동서간의 문화적, 상업적 교류가 활발했던 평화로운 시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서 무엇이 중동의 평화를 가능하게 했는가에 대해서 연구한다면 오늘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터키는 불안정안 중동지역에서 유일하게 정교분리와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현재는 온건한 이슬람 정당인 AK가 집권하여 상당한 경제적인 안정을 구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남부지역의 소수민족인 쿠르드 족의 분리 움직임은 여전하고, 중산층을 중심으로하여 이슬람교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는 가운데 이슬람 교리를 바탕으로하여 국가를 운영하자는 세력도 만만치 않고, 이에 반대하여 당초 근대 터키의 건국 이념인 정교분리의 원칙을 강력히 주장하는 군부중심의 세력의 대립의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해소할 새로운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하고, 터키의 숙원인 EU에 가입하는 문제도 프랑스 등 주요 EU 국가의 반대로 난관에 봉착해 있는 등 여러가지 중요한 과제가 산적해 있는 상황입니다.

오늘은 터키의 실질적인 수도인 이스탄불의 사진 몇 장을 소개 합니다. 이스탄불은 4세기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읍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476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 용병대장인 오도아켈(Odoacer)에 멸망된 후 1000년간 비잔티움 문화와 그리스 정교의 중심지였읍니다. 비잔틴 제국이 이렇게 오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서유럽에서는 게르만 민족의 여러나라들이 서로 세력 다툼을 벌리고 있었고, 중동지역에서는 이슬람교의 출현으로 메소포타미아와 북아프리카에서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11세기 이후에는 십자군 전쟁으로 유럽과 이슬람 세력의 충돌로 어부지리를 누리기도 했읍니다. 이스탄불은 실크로드의 시발지로서 오랜기간 물질적인 번영을 누렸는데 15세기에 이르러 아프리카 항로의 발견과 오스만 터키의 발호로 인하여 이스탄불을 통한 동서교역이 쇠퇴하자 몰락의 길을 가게 됩니다.

이스탄불은 1453년 오스만 터키의 메멧 2세에 의해서 함락되었는데 당시 오스만 터키는 난공불락인 이스탄불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 보다는 주변 지역의 소도시를 차근차근 정복하는 전략을 택해서 도시가 함락되기 직전에는 아시아와 유럽 방향에서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고 많은 주민들이 도주하여 인구가 3 ~ 4만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이 함락된 직후 메멧 2세는 이스탄불을 오스만 터키의 수도로 선포했읍니다. 오스만터키는 이민족과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정책을 써서 많은 유태인과 기독교도들이 도시에 거주하면서 전문직에 종사하여 오늘날에도 유태인 지구와 기독교도 지역이 있읍니다. 터키는 1차대전 패전이후 현대 터키 건국의 아버지인 케말 파샤가 수도를 내륙의 앙카라로 이전하여 한 때 쇠퇴하였으나 2차대전이후 도시를 재개발하고 1970년대 이후 주변지역의 공업의 발전으로 다시 인구가 늘고 현재와 같은 실질적인 수도로 발전하게 됩니다.

오늘날 인구는 약 11백만으로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에 걸쳐있는 세계 유일의 도시입니다. 유명한 보스포러스 다리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고 있고, 1988년 두번째 술탄 메멧 다리가 완공 되었지만. 인구 11백만의 도시를 동서로 연결하는 다리가 두개 밖의 없는 관계로 다리 주변의 교통체증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많은 시민들이 아직도 배로 보스포러스 해협을 왕래하고 있으며 시내의 Blue Mosque, 소피아 사원, 톱카피 궁전 등 많은 고적들이 잘 보전되어 있어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스탄불의 또 하나의 명물은 그랜드 바자인데 1453년 메멧2세가 도시를 점령한 후 건설한 재래시장 입니다. 과거 실크로드 교역의 주역이었던 향료, 섬유, 카페트는 물론이고 현대의 전자제품까지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읍니다. 이스탄불의 또 하나의 자랑은 음식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중국음식, 인도음식과 더불어 독자적인 발전을 해온 터키음식은 주변에서 생산되는 풍분한 채소와 유제품을 기반으로하여 유목 시절부터 내려오는 다양한 육류요리가 주종을 이루는데 우리 입맞에도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얼마전에는 강남역 부근에 터키 전문음식점이 생겼읍니다. 터키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많은 전사자를 낸 우리와는 피로 이루어진 동맹관계이고 최근에는 2002년 월드컵 때 한국 관중의 열열한 응원과 특히 3-4위전의 선수와 관중이 보여준 아름다운 모습은 아직도 많은 터키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읍니다.

 

블루 모스크

 

그랜드 바자 내부

 

 

소피아 대성당 내부

 

지중해 연안 안탈랴 라는 도시의 하드리아누스(로마황제) 개선문

 

 

톱카피 궁전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본 돌마바체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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