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ycurgus - The Spartan

2012. 3. 23. 10:43리더십


리쿠르구스는 기원전 9세기 경에 활동했던 스파르타(Sparta)의 지도자 입니다.  실제로 존재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Herodotus), 크세노폰(Xenophon)이나 플루타그Plutarch)의 기록에 동장하며 고대 스파르타의 군국주의 체제의 근간인 시민 간의 평등, 군사력과 검소한 생활을 국가의 시스템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읍니다.  고대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펠로폰네스(Peloponnes)반도의 유로타스계곡에 위치한 4개의 부락에서 유래합니다.  

리쿠르구스의 군국주의 체제를 통하여 세력을 확장하여 인근의 그리스 도시국가를 석권하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통하여 더욱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아테네와 연합하여 수차에 걸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이후 아테네와의 주도권 경쟁으로 야기된 펠레폰네스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리스 전체와 지중해의 맹주가 되나 이후 지나친 팽창을 위한 해외원정으로 결국은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에게 복속됩니다.

리쿠르구스는 스파르타의 왕자였읍니다.  형인 스파르타의 왕 폴리덱테스(Polydectes)가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그는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로부터 얼마 후 형의 미망인이 형의 사망시 임신을 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어 태어날 왕자에게 왕위를 양보하려고 합니다.  이를 안 형수가 비밀리에 임신 중인 아기를 낙태하고 자기와 결혼하여 왕의 지위를 같이 누리자는 제안을 합니다.  이에 리쿠르구스는 아이가 태어나면 자기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위험스러운 낙태는 하지 말자고 제안하여, 결국은 형의 아들인 왕자가 태어납니다. 왕자가 태어나자 마자 그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아기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자신은 섭정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도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이 생기자 그는 스파르타를 떠나서 유랑생활에 나서게 됩니다. 이후 스파르타인들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서 고국에 돌아온 그는 스파르타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하여 여러가지의 정치적 사회적인 계획에 착수합니다.

그가 제일 먼저한 일은 지도체계의 확립 입니다. 그는 당시 28명의 스파르타의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국가의 중요한 전략을 정책을 결정하는 정치기구를 만듭니다.  당시 스파르타는 왕들과(스파르타는 2명의 왕이 있읍니다) 시민 간의 반목으로 참주정치와 민주주의가 번갈아가면서 실시되는 혼란기였는데 그는 왕정은 유지하되, 시민의 대의를 반영하는 정치기구를 두어서 장기적인 안정을 도모했읍니다.  이 과정에서 리구르쿠스의 의도를 의심하는 왕들의 반발과 정치참여를 꺼려하는 일부 지도자들로 인하여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으나,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반대파를 꾸준히 설득하여 전체 스파르타 시민을 아우를 수 있는 대의기구을 만들수 있었읍니다.

그 이후의 개혁은 당연히 경제적인 것으로 그는 시민들을 설득하여 농지를 국유화하여 공정하게 분배하는 한편 통화를 개혁하고 기본적인 것을 제외한 사유재산을 몰수하여 부의 불균형을 해소하였읍니다 -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일을 시민들을 상대로 설득할 수 있었는지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유감 입니다. 리쿠르구스는 특히 사치를 없애기 위해서 스파르타를 단위별로 조직하여 각 단위별로 공동식사를 하도록 하였읍니다. 플루타크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부유층의 반대가 극심해서 리쿠르구스에 대한 신체적인 위협도 상당히 심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리쿠르구스가 부자들에게 쫒겨서 신전으로 피신 중이었는데 추격하던 알칸더라는 사람의 막대에 얼굴을 맞아서 안구가 튀어나와 한쪽 눈을 잃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칸더를 용서하여 그는 평생동안 리쿠르구스의 하인으로 추종자가 되었다는 일화도 있읍니다. 그는 이전의 전쟁으로 생포한 인근 도시국가 출신의 노예(Helot)로 하여금 경제활동을 담당하도록하고 스파르타의 시민은 정치, 체육, 군사활동의 참여에 치중하도록 하였읍니다.

리쿠르구스가 그 다음으로 중요시 한 것은 건강한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었읍니다. 이를 위하여 그는 여성의 신체적인 건강을 중요시 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여성들도 그 당시의 주된 체육활동인 달리기, 창 던지기, 원반 던지기, 레슬링 등을 하도록 장려하였읍니다. 당시의 경기는 모두 나체로 했는데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고, 나체의 체육활동을 통하여 건강한 신체와 소박한 생활의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했다고 합니다. 여성들의 나체의 체육활동은 젊은 남성들의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행해졌는데 우선 여성들이 수치심을 극복하여 강인한 정신을 배양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성들이 이같은 상황에서는 신체를 단련하여 아름다운 몸을 유지하는데 힘쓸 수 밖에 없었고, 여성들 또한 남성들의 건강과 정신상태를 나체의 체육활동을 관찰을 통해 판단하고 장려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녀간의 개인적인 만남은 은밀하게 이루어졌고, 남자의 나이가 30세가 되어야 그동안의 합숙에서 벗어나 공개적으로 독립된 가정을 이룰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외에도 결혼을 장려하고 건강하고 유전적으로 우수한 아이들을 낳기 위하여 결혼과 가정에 대해서 여러가지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규약을 제정했는데 지면상 생략합니다. 중요한 것은 태어난 아기는 부모의 책임이 아니고 국가의 소유라는데 다른 제도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읍니다. 갓 태어난 아이는 건강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기로 분류되어 약한 아이들은 환경이 열악한 곳으로 보내서 그곳에서 살아남은 아이만 키웠다고 합니다.   이렇게 선별된 아이들은 검소한 음식과 고된 육체적인 훈련을 통하여 국가에 대한 복종과 헌신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 성인이 됩니다. 

이렇게 고된 훈련을 받고 자란 소년들은 유사히 훌륭한 병사가 됩니다. 그 당시 스파르타군은 전투를 할 때 밀집대형으로 적을 공격했는데 선체적, 정신적으로 우수하여 밀집대형의 중앙에 있는 왕의 호위병으로 선발되는 것을 가장 큰 영예로 삼았다고 합니다.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스파르타군은 적을 추격하되 승리가 확실해 지면 더 이상 적을 추격하거나 살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불필요한 전투력을 낭비하지 않고, 스파르타군에게 항복하거나, 패배 후 도주하면 죽이지 않는다는 인식하여 스파르타 군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게 한다는 의도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회 전반의 시스템을 본인의 이상에 맞게 개조한 리쿠르구스는 자신은 더 이상 스파르타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로들에게는 자신의 개혁이 정당한지 델피의 신전에 가서 신탁을 받기로하고 원로들에게는 자기가 돌아올 때 까지는자신이 제정한 법령과 규율을 지키도록 약속을 받습니다. 델피에 도착한 그는 자신의 법의 영속성을 위하여 그곳에서 자살합니다.  이후 스파르타는 약 5백년 동안 리쿠르구스의 법을 계승하여 결국은 그리스의 맹주가 됩니다.

법의 내용과 그 적정성에 대해서는 수천년 후의 우리가 왈가왈부 할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 리쿠르구스와 무려 5백년 동안 맹세를 지킨 스파르타 시민들의 정신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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