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19. 09:58ㆍ리더십
1857년 6월 리처드 버튼(Richard Francis Burton, 1821~1890)과 존 스피크(John Hanning Speke, 1827~1864)는 아프리카 동부의 잔지바르에서 약 130명의 원주민으로 구성된 탐험대를 이끌고 나일강의 원천을 찾기 위한 원정에 나섰다. 그들은 노예 교역로를따라서 9개월만에 약 1600km의 내륙의 탕가니카 호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길은 병마, 열악한 보급과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그들은 번갈아 가며 각종 풍토병에 걸렸고, 스피크는 병으로 한때 시력과 청력을 잃기도 하였다.
탕가니카 호수에 도착했지만 필요한 장비의 대부분을 잃거나 도둑맞아 나일강의 원천을 찾는 추가 탐험은 하지 못하고 다시 버튼이 병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스피크는 북쪽의 빅토리아 호수를 발견하고 나일강이 이 호수에서 시작한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을 확인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영국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영국에 먼저 돌아온 스피크는 자신이 두 호수를 발견했다고 발표했고, 버튼의 질병으로 자신이 사실상 탐험대장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여 유명인사가 되었다. 뒤늦게 영국에 도착한 버튼은 당연히 반론을 제기했고 두 사람은 이 싸움에서 모두 패자가 된다. 스피크는 1864년 총기 오발로 사망하고 버튼은 더 이상 탐험대를 맡지 못하고 한직을 전전하며 실의에 빠진 채 생을 마감한다.
버튼은 약 29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천재, 아라비안 나이트, 인도의 성전( 性典) 카마수트라를 번역하는 업적을 남겼고 또 아랍인으로 변장하여 목숨을 걸고 메카를 여행했고, 스피크와 함께 소말리아를 탐험하기도 했다. 그는 스피크의 의지와 능력을 인정하여 호수 탐험단에 발탁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파탄으로 끝났다. 버튼은 공감능력이 부족했던 듯, 스피크가 왜 자신을 배신했는지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랍어와 스와힐리어에 능통했던 버튼은 풍부한 현지정보로 여러 결정을 내렸지만 그 내용과 배경을 스피크에게 설명하는 것을 게을리했다. 버튼은 체력이 좋고 지도 작성, 측량에 능한 스피크의 강점을 활용하려 하지 않았다. 스피크는 탐험 방향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감정이 격해져 서로 총을 겨누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이렇게 버튼과 스피크는 수많은 갈등과죽을 고비를 함께 넘기며 탐험을 마친다.
상사로서 리처드 버튼은 어떤 행동을 해야 했을까? 목표를 정하는 과정에 스피크를 개입시키고 그가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 끝까지 들으며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스피크의 강점을 살려 탐험의 실행 부분은 그에게 맡기고 자신은 탐험대의 사기진작, 보급, 주변의 부족과의 우호관계에 주력하는 역할 분담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된 결정으로 부하들이 고생할 때 사과하는용기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무엇보다 매일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야하지 않았을까? 리더는 자기성찰을 통해서 성장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자기성찰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고, 성공과 실패에서 배우고, 목표와 역할을 명확히 하고, 시야를 넓히고, 버튼이 겪고 있었을 엄청난 스트레스를 좀더 잘 관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버튼은 기록을 잘 하는 사람으로 유명하고 엄청난 양의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매일 기록하는 시간에서 한 15분 정도를 자기성찰의 시간으로 활용했다면 탐험은 다르게 마무리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