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거리 - Power Distance

2018. 3. 8. 08:09리더십


심리학자 기어트 홉스테드는 세계 53개국을 대상으로 이른바 ‘권력거리(powerdistance)’를 조사했다. ‘권력거리’는 어느 조직에서 “부하들을 그들의 상사들로부터 격리시키는 감정적 거리”를 말한다. 이걸 알아내기 위한 설문으로는 ① 종업원들이 상사에게 이견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② 부하직원이 본 상사의 실제 의사결정 스타일, ③ 부하직원이 선호하는 상사의 의사결정 스타일 등이 제시되었다.

권력거리가 작은 나라에서는 부하직원이 상사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약하며, 상사와 부하직원 간의 상호의존을 선호한다. 권력거리가 큰 나라에서는 의존과 반()의존 간의 극화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경우에는 부하직원과 상사 간의 심리적 거리는 크다. 그래서 부하직원이 직접 상사에게 다가가서 반대의견을 내놓는 일은 좀처럼 드물다. 권력거리가 큰 순서대로 나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말레이시아, (2) 과테말라·파나마, (4) 필리핀, (5) 멕시코·베네수엘라, (7) 아랍권, (8) 에콰도르·인도네시아, (10) 인도·서아프리카, (12) 유고슬라비아, (13) 싱가포르, (14) 브라질, (15) 프랑스·홍콩, (17) 콜롬비아, (18) 살바도르·터키, (20) 벨기에, (21) 동아프리카·페루·태국, (24) 칠레·포르투갈, (26) 우루과이, (27) 그리스·한국, (29) 이란·대만, (31) 스페인, (32) 파키스탄, (33) 일본, (34) 이탈리아, (35) 아르헨티나·남아프리카, (37) 자메이카, (38) 미국, (39) 캐나다, (40) 네덜란드, (41) 호주, (42) 코스타리카·독일·영국, (45) 스위스, (46) 핀란드, (47) 노르웨이·스웨덴, (49) 아일랜드, (50) 뉴질랜드, (51) 덴마크, (52) 이스라엘, (53) 오스트리아

이 조사에서 한국은 28위를 차지했다. 홉스테드는 권력거리가 크면 더 집합주의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고, 권력거리가 작으면 더 개인주의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경향의 예외라 할 수 있는 프랑스와 벨기에는 중간 정도의 권력거리가 강한 개인주의와 결합되어 있는 경우이며, 이와 반대 형태로 권력거리는 작으면서 개인주의는 중간 수준인 나라로는 오스트리아와 이스라엘 등이 있다. 또 비교적 작은 권력거리가 뚜렷한 집합주의와 결합되어 있는 나라로는 코스타리카를 들 수 있다. 코스타리카는 중남미에서 가장 뿌리가 굳건한 민주국가로 정규 군대가 없다.

프랑스의 이런 독특성과 관련, 프랑스 사회학자 미쉘 끄로지에르는 “프랑스 문화상황에서, 면전에서의 의존성은 찾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반인의 권위관은 아직도 절대주의적이다. 이 두 가지 태도는 서로 모순된다. 그러나 이 두 태도는 관료주의적 체계 안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왜냐하면, 공적인 규칙과 중앙집권제로 인해 권위에 대한 절대주의적 생각을 지닌 채로 아주 직접적인 의존 관계는 대부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출신 필리쁘 디리반느는 프랑스식 조직의 원리를 ‘명예의 논리’로 설명했다. 이미 나폴레옹 이전의 프랑스 왕정 때부터 존속했던 이 원리의 의미는 모든 사람이 등급을 가지고 있지만(큰 권력거리) 어떤 사람이 그 등급에 속하는지는 집단에 의해 결정되기보다는 전통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남에 대한 의무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이며, 이것은 계층화된 형태의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지낸 한국인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인들 사이에서 위·아래에 대한 개념이 없는 걸 보고 놀라게 되는데,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작은 권력거리 문화를 말해 주는 것이다. 어른을 존중해 주는 문화가 전혀 없으며, 심지어 군대에서조차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고분고분 순종하지 않는다. 시민들이 참여하는 행사에서 총리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으며, 총리실의 응접 세트도 한국 동사무소의 동장실 수준이다. 시몬 페레스의 경우처럼 총리를 지낸 사람이 부총리와 장관직을 맡기도 한다. 권력거리가 큰 한국에선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98년 12월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는 자기 아이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한참을 기다린 ‘사건’도 스웨덴 사회의 권력거리가 작다는 걸 여실히 말해 주었다. 국왕이 기다린 이유는 그가 수표로 지불하려는데 수표 카드를 지니지 않아 상점의 점원은 그의 수표를 확인절차 없이 받을 수 없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 국왕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1크라운짜리 동전을 꺼내 점원에게 보이자 비로소 점원은 그 동전으로 수표의 확인이 끝난 것으로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점원은 수표의 진위 여부를 철저하게 검사하고 수표 소지자의 이름과 주소를 확인하고 난 후에야 그 수표를 받았다는 것이다.

반면 2005년 5월 한국에서 일어난 인기 개그맨 김모(26세)씨의 후배 폭행 사건은 한국 사회의 권력거리가 매우 크다는 걸 말해 준 에피소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김모씨는 방송국 옥상에 후배 신인 개그맨 14명을 집합시킨 뒤, 이 가운데 김모(29세)씨에게 건방지다는 이유로 머리를 바닥에 박게 하는 이른바 ‘원산폭격’을 시키고 허벅지와 엉덩이를 각목으로 35차례나 때려 전치 6주의 상처를 입혔다.

한 개그맨은 “방송계에서 개그맨들의 선후배 관계가 가장 경직돼 있고 얼차려 등 군기잡기가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한겨레』 5월 12일자 사설 「개그맨 사회의 슬픈 뒷모습」은 “연륜과 기수를 중시하는 문화는 우리 사회에 뿌리가 아주 깊다. 그러나 평소에 선배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혀 큰소리로 인사한다는 개그계의 관행은 조직폭력배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2003년 3월 13일 문화관광부장관 이창동은 장관 취임 2주만에 한국 관료 사회의 권위주의를 ‘조폭 문화’로 규정했는데, 이 같은 비판엔 공무원 사회에 존재하는 강한 권력거리 문화도 포함됐다. 각종 의전행사가 그 대표적인 예다. 한 사무관은 국경일 행사에 차출돼 나가 주차안내원 노릇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주차요원이 따로 있는데도 기관장 행사라는 이유로 차출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권력거리 문화에도 변화의 조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예컨대, 해병대는 2005년 1월 1일부터 연대급 이하 모든 부대의 간부식당을 폐지하고 연대장부터 이등병까지 한솥밥으로 식사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한 문화권 내에서도 일반적으로 조직의 공동체화가 심할수록 권력거리가 커진다고 볼 수 있다. 공동체화한 조직은 ‘조직의, 조직에 의한, 조직을 위한 조직’으로 전락해 내부 위계질서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른바 ‘기수 문화’가 강한 군대나 검찰 조직이 바로 그런 경우다. 그래서 이런 조직에서는 아랫기수가 윗기수를 앞질러 승진하게 되면 윗기수들은 옷을 벗는 게 관행처럼 돼 있다.

2005년 4월 28일 보건복지부장관 김근태는 한국언론재단이 주최한 ‘고령 사회 대응과 현안 과제’라는 주제의 포럼에서 “검찰을 보면 재미있고 큰일”이라며 “동기가 (검찰총장 등이) 되면 다 나가는 것은 경직된 사회이고 사회를 유지하게 어렵게 하는 만큼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운동권은 학번 체계가 권력의 수단이며, 행정부는 행정고시 몇 회냐가 위계질서가 된다”면서 “엘리트 계층일수록 질서를 나이로 잡는데 이를 깨지 않으면 고령 사회를 극복할 수 없어 이에 대한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근태의 주장은 한국 사회의 권력거리를 줄이는 것이 좋은 복지 정책일 수도 있다는 걸 시사한다.

한국항공대 교수 최봉영은 한국 사회에 강하게 남아 있는 차별과 억압의 근본적 원인은 ‘존댓말’과 ‘반말’로 이루어진 ‘존비어() 체계’에 있다며 이것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민주화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한국인들이 존비어 체계를 갖춘 언어를 사용하는 까닭에 모든 사물을 ‘위와 아래’, ‘존귀함과 비천함’의 관계로 바라보려는 무의식적인 인지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그 결과 대등과 호혜보다는 차별과 억압 관계를 더 당연하고 편안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는 “존비어 체계가 없이 호칭에 대한 높임말만 있는 중국이나 영국의 경우 결코 예절이 문란한 사회가 아닌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봉영의 주장은 학계의 폭넓은 지지를 받진 못하고 있지만, 한국의 존비어 체계가 권력거리를 크게 만든다는 가설은 가능할 것이다.

권력거리는 공사() 구분 의식과도 연결돼 있다. 속된 말로 “잘 대해 주면 공사를 가리지 않고 기어오른다”거나 “사람이 좋으면 바보로 안다”는 속설을 믿는 사람일수록 아랫사람과 거리를 두려는 경향이 강할 것이다. 공사 구분을 엄격히 하는 문화가 정착될 때에 비로소 권력거리도 작아질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권력거리 (세계문화사전, 2005. 8. 20.,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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