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해군와 피셔 제독

2012. 2. 25. 14:37리더십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존 피셔(John Arbuthnot Fisher, 1841 – 1920)는 영국국민들에는 트래팔가 해전의 영웅인 넬슨제독에 버금가는 인물로 존경을 받고 있다.  넬슨제독이 나폴레온의 해군과의 해전에서 연전 연승을 거둔 현장형의 지도자라면 피셔제독은 19세기말 독일로부터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있던 영국해군의 전반적인 시스템의 혁신을 완성하여 전략형의 지도자이다. 넬슨이 권위보다는 배려와 애정을 기반으로 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라면 다혈질의 피셔는 냉정한 능력위주의 통솔을 추구하는 리더였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확신을 가진 인물로 상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주장을 토로하는데 전혀 거침이 없었다.

 

당시 유럽은 보불전쟁 이후 더 이상의 무력 충돌을 피하면서 능수능란한 외교활동을 통하여 유럽의 주도권을 확보한 독일과 영광 있는 고립  (Splendid Isolation)’ 이라는 유럽 불간섭 원칙을 내세운 해양세력의 영국의 양강 구도의 안정된 체제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독일통일의 주역인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를 실각시키고 친정체제를 구축한 젊은 빌헬름 2세는 유럽에서의 주도권에 만족하지 않고 해외 식민지 확장 정책을 추구하였으며 이 같은 정책은 당시 세계의 제해권을 잡고 있던 영국해군과의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다. 빌헬름 2세는 영국과의 해상 충돌에 대비해서 빠른 속도로 최신의 거함을 건설하여 영국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1904년 해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피셔는 새로운 국제 정세와 산업혁명의 성숙화롤 인한 기술을 발달로 영국해군에게도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패셔가 해군에 근무하는 동안 영국해군은 범선에서 철갑의 증기선으로 발전했지만 새로 건조되는 독일의 거함에 맞설 수 있는 영국해군의 현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과거 식민지 정복에 투입되었던 낡고 느린 군함들은 더 이상 독일과의 전쟁에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는 20세기 초의 해전에서는 사거리가 길고 정확한 대포를 장착한 군함이 필요함을 역설하였지만, 이 대형 군함은 결국에는 잠수함이나 어뢰를 장착한 어뢰정에게는 취약할 것을 정확히 예견하여 이들의 개발을 추진하였다. 그는 군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 추진하였고, 당시 영국 해군 항해 중의 주요 식량은 딱딱한 비스킷이었는데, 매일 신선한 빵을 만드는 당시에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수병들의 건강 개선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전쟁의 신봉자는 아니었지만 독일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독일에 대해서 압도적인 해군력의 우세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영국 해군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인도, 이집트, 영국을 잇는 교역항로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지중해와 인도양에 상당한 해군력을 배치하고 있었는데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서 지중해와 인도양 함대의 전력을 일부 독일 부근의 북해에 배치하여 많은 논란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 같은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반대에 직면하였는데 특유의 열정과 집념으로 자기의 목표를 관철시켰다.  그의 열정적인 다변은 유명해서 당시 국왕인 에드워드 7세와의 면담에서 제독, 내 얼굴 앞에서 주먹 좀 그만 휘두를 수 없는가?" 는 주의를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재임 시 정부, 의회, 야당, 해군 내 반대파와 논란을 야기한 그는 1910년 퇴임 했는데, 결국 1차 세계 대전은 발발할 것이며 그 시기는 발트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독일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의 키일 운하가 완성되는 1914 10월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실제 키일 운하는 1914 5월에 완성되었고, 1차 세계 대전은 1914 8월에 발발한다)

 

1차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은퇴한 피셔를 다시 해군 사령관에 임명하고 피셔는 자신이 신임하고 있던 존 젤리코 제독에게 해군 전력을 집중시켜서 결국 유틀란드 해전의 승리를 이끌어 북해에서의 제해권을 장악한다.  당시 상사인 해군성 장관은 나중에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윈스턴 처칠이었다.  윈스턴 처칠은 교착상태에 빠진 프랑스 전선에 집착하지 말고 터키를 공격하여 독일 남쪽에 교두보를 마련한 후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동맹을 와해 시키는 전략을 추구한 반면, 피셔는 상대적으로 방어가 취약하고 독일 수도인 베를린과 가까운 발트해 연안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독일을 궤멸시키는 전략을 추구하였다.  결국 처칠의 주장대로 터키의 다다넬스 해협 부근의 갈리폴리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였으나 터키군의 예상외의 효율적인 방어 작전으로 상륙 작전은 참담한 실패로 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상륙작전에 대한 해군의 지원이 미온적이었다는 비판을 받은 처칠과의 마찰 끝에 피셔는 사임을 하게 되고 결국 처칠도 사임하여 1940년에야 수상으로 취임하여 재기하게 된다.

 

애처가이고 모범가장인 피셔는 춤을 찰 춰서 자신이 지휘하는 함대가 항구에 정박할 때는 댄스파티를 자주 열었고, 이것 때문에 때때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고, 영국 대중은 그에게 끊임없는 애정과 지지를 보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인간적인 매력이 철철 넘치는 인물이 나와서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