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나날 - The Remains of Day. Kazuo Ishiguro
이 책은 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작가가 쓴 책인데 이 사람은 1960년 6세 때 영국으로 이민가서 쭉 영국에서 살았으니 언어상으로는 영국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 물론 영어로 쓰여진 이 책의 내용은 일본계 작가와는 다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1920년대에서 1950년대 사이 영국 귀족의 저택에서 일생을 보낸 늙은 집사의 회상.
주인공인 스티븐스는 일생을 독신으로 달링턴 저택의 집사로 일한다. 하지만 달링턴 가문은 몰락하고 저택은 미국인 부호에게 팔리게 된다. 주인공도 새로운 주인을 모시게 되는데 소탈하고 친절한 성격의 새 주인이 스티븐스에게 그 동안의 노고를 인정하며 며칠 간 자동차 여행을 할 것을 제안해서 주인공은 주인의 차를 몰고 며칠 간의 영국 중부의 여행을 떠난다. 스토리의 전개는 여행기간의 에피소드와 달링턴 가문의 전성기 시절 자신이 집사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활약했던 시절에 대한 회상으로 이루어진다.
이 책의 주제는 회상, 직업에 대한 자부심, 희생과 충성심 같은 것이 아닐까? 주인공은 1920년대부터 달링턴 저책에서 집사로 일을 하는데 그 때가 영국 귀족들이 몰락하기 전 마지막 황금기였다. 귀족의 저택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많은 하인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서 집사(Butler), 시종(Valet), 하인(Footman), 시종 혹은 사환(Page),Housekeeper(여자 하인의 우두머리), 가정부(Chambermaid) 등등의 우리가 보기에는 비슷비슷한 하인들이 잘 짜여진 업무 분장과 매뉴얼에 의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유능한 집사는 주인의 눈에 거의 띄지 않으면서 주인의 의도와 필요를 잘 읽어서 전혀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런 직업 윤리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부터 영국의 전통으로 이어져서 저택의 하인들은 상당한 직업적인 자부심을가지고 있었다. 현대에도 이런 영국식 서비스의 전통은 남아있어서 필자가 80년대 영국에서 근무할 때도 오래 된 식당이나 호텔에 가면 종업원들이 번잡스럽게 행동하지 않고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있다가 손님이 무엇인가 필요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그림자처럼 나타나서 내가 필요한 것을 해결해 주곤 했던 기억이 난다.
주인공은 이런 투철한 직업 윤리 때문에 같은 저택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임종을 빤히 알면서도 보지 못하고, 자신을 연모하던 하우스키퍼(여자 가정부의 우두머리)의 감정도 알아채지 못한 척한다. 이제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서 이차대전이 끝나고 대다수의 귀족의 저택이나 장원은 그 운영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저택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상주에서 출퇴근 형식으로 바뀌었고, 과거와 같은 신의와 충성심을 바탕으로 한 주인과 하인의 관계는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형태로 바뀐다.
이 소설은 복잡한 스토리나 악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전 생애를 바친 자신의 직업이 무엇인가 가치있는 일에 기여하고 그 일을 하는 과정에 큰 자부심이 있는,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필요로 하지 않는, 그저 과거의 아름다운 시절을 회상시키는 장식품이 되고 있는 한 노인의 잔잔한 회상이다. 하지만 이 노인은 아직도 자신의 역할은 남아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남아있는 나날을 맞이하려고 한다. 앤서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이 주연한 영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