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론 - On War by Carl von Clausewitz
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780 ~ 1831)는 프러시아의 군인이자 군사이론가이다. 프러시아령인 마그데부르그의 중류가정 출신인 그는 직업군인이 되었는데 그 당시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시민혁명을 유럽 각국으로 수출하려는 프랑스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주변 국가간의 충돌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는 하사관으로 프랑스 시민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고 이후 프러시아의 사관학교를 수료하고 장교가 되었는데 후에 프러시아 군의 초대 참모총장이 된 게르하르트 샤른호스트 장군의 후원을 받고 군의 작전통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집권 후 유럽은 다시 전화에 휩싸이게 된다. 그는 다시 참전하여 훗날 나폴레옹의 가장 찬란한 승전으로 기록된 예나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그는 프러시아 사관학교의 교장이 되어 1831년 사망 직전까지 장교 육성과 군사전략 연구에 생을 바치게 된다.
그의 전쟁론(Vom Kriege)은 전투지침서라기 보다는 전쟁에 관한 철학책이라는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전의 많은 군인들이 다양한 군사적 토픽에 관한 글을 쓰기는 했지만 전쟁 전체의 차원에서 철학적인 접근을 클라우제비츠가 유일하며, 톨스토이가 그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서 유사한 접근법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정의를 내리려고 했다.
그가 이 책에서 "전쟁은 우리의 적을 폭력행위를 통해 굴복시켜 우리의 의지에 따르도록 하는 행위 - War is thus an act of force to compel our enemy to do our will." "전쟁은 다른 형태의 정치적 행동의 연장 - Ware is merely the continuation of policy by other means." 이라고 정의한다. 전쟁의 3대 요소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한 폭력을 추구하는 감정적 요소, 실제 상황의 다양한 변수와 이에 대한 대응력, 그리고 준비단계에서 이성적인 사고와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군사전략서가 주로 전쟁에서의 하드웨어와 행동에 포커스를 맞추었다면 클라우제비츠는 전쟁과 이를 수행하는 군인들과의 관계와 인적요소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고, 이 이론은 나중에 유럽의 군사교육과 전쟁 준비의 기본이 되었다. 비스마르크와 함께 독일 통일의 주역인 프러시아군 참모총장인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 1800 ~ 1891)는 "작전계획은 교전이 시작되자마자 무용지물이 된다 - No plan survives contact with the enemy." 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이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의 불확실성과 이에 따른 인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잘 대변한 말이다.
클라우제비츠는 레닌, 스탈린과 마오쩌뚱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레닌과 스탈린은 새로 구성된 적군(Red Army)이 공산당의 정치적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임을 명확히 하였고 이를 위해서 군의 정신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였고, 각급 단위부대에 정치장교를 배치하여 군을 정치적으로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마오쩌뚱도 클라우제비츠에 심취하여 군의 인적요소, 특히 인민해방군과 대중과의 관계를 강조하여 장제쓰의 국민당 군을 누르고 중국 본토를 장악할 수 있었다.
서구에도 클라우제비츠는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오늘날 미국에서 강조하는 문민 우선 주의는 클라우제비크의 전쟁은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다. 맥아더를 비롯한 많은 천재적인 군인들이 이 원칙을 망각하고 전쟁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하여 정부와 충돌하고 낙마한 것은 좋은 예이며, 불확실한 정치적인 목표를 가지고 참전한 후 단순히 전쟁의 승리만에 집착한 존슨 대통령이 월남전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재선을 포기한 것이라던지, 전후 이라크에 대한 확실한 정치적 밑그림 없이 2차 걸프전을 일으켜 곤경에 처했던 부시 대통령도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