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내 이름은 빨강 - My Name is Red

Algeruz 2013. 4. 24. 15:04


"이제 나는 우물 바닥의 한 시체에 불과하다.  나의 마지막 숨이 끊어지고 이제 내 심장이 멎은지 오래되었지만 나를 죽인 그 사악한 살인자 외에 아무도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지 모른다. 그 비열한 놈은 내 맥박을 짚어보고 내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 배를 걷어차고, 이 우물까지 나를 끌고와 우물 바닥으로 나를 밀어 버렸다.  떨어지면서 내 머리는 돌과 부딪혀 깨어지고, 얼굴과 이마 그리고 뺨은 짓뭉개졌다.  온몸의 뼈는 으스러지고 내 입속에는 피가 가득 찼다."


소설의 첫머리 치고는 상당히 충격적이다. 이 사람이 정말 죽은 것인가?  나중에 다시 살아나나?  독자로 하여금 소설의 내용에 호기심을 갖게 한다. 터키의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확립하게 한 '내 이름을 빨강 - My Name is Red'은 16세말 술탄 무라트 3세 통치 하의 오스만터키의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한 화공의 살인 사건이 발단이 된다.  술탄은 궁정화원의 책임자로 하여금 자신의 통치 기간 중의 업적을 기리는 화보집을 편찬하도록 명한다. 당시 오스만터키에서의 그림은 이슬람 양식의 세밀화(Miniature)로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는 엄격한 규칙을 따랐다.  화가의 개성보다는 그림의 세부 묘사의 테크니크가 중요하고, 이슬람교의 우상숭배 배척의 이념에 따라서 그림 속에서 묘사되는 사람이나 동물의 개성과 생명력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한 세밀화를 여러 화가가 함께 그리는 경우도 많았고, 예외도 있지만 화가는 자신의 그림에 사인을 남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소설에서도 많은 화가들이 자신의 그림임을 알리기 위해서 그림 속에 작은 서명을 남기거나, 그림의 작은 부분을 자신 만의 방법으로 독특하게 묘사하다 비판을 받는 장면이 묘사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 화보집을 이슬람 전통 양식이 아니고 당시 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양식에 따라서 원근법과 피묘사체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이슬람 미술의 원칙에 배치되는 방식을 채택하여 제작되었다. 이 화보집의 제작의 책임자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휘하의 화공로 하여금 그림의 일부분만 그리게 하고 나중에 합치는 방법으로 비밀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어떻게 숙련된 화공들이 자신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모르고 있을 수가 있겠는가?  드디어 자신이 신성모독이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한 화공의 동료 화공을 살해에 우물 속에 밀어 넣는 사건이 발생하고 곧이어 이 프로젝트의 책임 화공도 무자비한 죽음을 당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사건의 해결을 맡은 책임 화공의 조카인 '검정 -  Black' 과 그의 어린 시절부터의 연인인 아름다운 '세쿠레 - Shekure' 이지만 스토리의 내레이션은 수시로 바뀌는, 정말 이스탄불의 미로와 같이 복잡한 소설이다.  위에서 보다시피 이 소설의 첫 내레이터는 살해 당한 화공이지만 모든 주요 등장인물이 번갈아 가면서 내레이션을 담당하고 심지어는 동전, 사탄도 등장하여 스토리텔링을 하는 등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이스탄불에서와 마찬가지로 길을 잃을지도 모르는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파묵은 아마도 자신의 소설이 세밀화처럼 읽히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등장 인물과 내레이터들, 그리고 내레이터가 바뀔 때마다 제시되는 다른 시각들과 스토리에서 묘사되는 싸늘한 겨울날의 이스탄불의 시가지,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세밀화에 르레상스의 새로운 미술 기법도 가미한 것이 아닐까?  서구 미술의 영향을 받느냐 마느냐 하는 갈등은 조만간 최전성기를 지나고 서구의 과학 문명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곧 유럽의 병자로 전락하는 오스만터키의 앞날을 예고하는듯 하다.